역사

옛날 일본에서는 무력으로 자신과 영지를 걸고 각지에서 전쟁이 일어난 시대가 있었습니다. 전국 시대(戦国時代)라 불리는 이 시대에 일어난 사건과 인물은 현재에도 많은 일본인의 사랑을 받으며 영화나 TV의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누야마성은 이 전란이 한창일 때 축성되어 입지의 중요성 때문에 성주가 자주 바뀌었습니다. 또한 전란 시대를 통일하려 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통일을 완성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평화의 시대를 만든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같은 전국 시대를 대표하는 무장들에 의해 역사적인 전쟁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일본의 성은 그 시대와 각 지방의 전투 방식에 따라 건축되었습니다. 일본이 조정 중심의 시대에서, 무사의 시대를 거쳐 평화의 시대에 이른 역사를 배경으로, 일본의 성과 이누야마성의 역사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시대의 흐름
  • 일본의 성과 이누야마성의 역사

구석기 시대(旧石器時代)

일본 열도는 대륙과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고 석기를 사용해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았습니다.

  • 約36000年前

죠몬 시대(縄文時代)

각지에 정착해서 촌락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 約13000年前

야요이 시대(弥生時代)

벼농사가 확대되고 쌀을 저장할 수 있게 됨에 따라 토지와 물, 작물을 둘러싸고 촌락 간의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싸움이 반복되는 가운데 야마타이코쿠(邪馬台国)의 히미코(卑弥呼)를 여왕으로 하여 통일이 이루어 집니다.

  • 約2500年前

주위를 해자나 제방(토루, 土塁), 담으로 둘러싼 ‘환호 집락’이라는 집락 유적이 발견되었고 공격해 오는 적에 대비하기 위해 일본에서의 성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훈 시대(古墳時代)

야마토 지방(나라현)에 각지의 수장을 통합한 야마토 정권이라는 정치 권력이 확립되었습니다.

  • 300

해자로 에워싸인 거관(居館)이 각지에서 세워졌습니다. 각지의 수장이 자신의 저택을 방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야마토 정권이 아스카(나라 분지 남부)에 왕궁을 건설하고 실질적으로 일본을 지배하는 왕조(조정)가 됩니다.

  • 600
  • 700

규슈에서 세토나이해 일대에서 조선 반도와의 긴장 관계와 외교 관계에 의해 산과 구릉이 이어져 있는 성벽(토루와 석벽)으로 둘러싼 ‘고대 산성(조선식 산성)’이라는 성이 축조되었습니다.

한편 도호쿠 지방에서는 야마토 정권을 따르지 않는 집단을 다스리기 위해 관청(政庁, 정청) 주변을 사각형 담으로 에워싼 ‘성책’이라는 시설이 축조되었습니다.

나라 시대(奈良時代)

나라에 도읍(왕조가 있는 곳)인 헤죠쿄(平城京)를 건설하고 율령(법률)을 국가와 사회의 기초로 합니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도읍을 교토의 헤이안죠(平安京)로 천도하고 왕조 사회의 전성기를 맞이하며 평화로운 시대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윽고 지방에서는 불만을 가진 농민이 무장한 집단(무사단)이 되어 무사단의 군사력이 왕조의 권력을 압도하게 됩니다. 특히 다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를 이끄는 헤이씨(平氏)가 주도권을 잡았는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를 이끄는 겐지(源氏)에게 멸망하고 맙니다.

  • 800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헤이시(平氏)를 멸망시킨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는 무가 정권(가마쿠라 막부)을 성립시키고 교토의 왕조와 병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요리모토 사후 막부를 지탱하던 가신들의 치열한 권력 다툼이 이어지면서 막부는 영향력을 잃게 됩니다. 같은 시기, 왕조에서는 황위 계승을 둘러싼 문제가 일어나게 되고 왕조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이 막부 타도에 나섭니다. 이 싸움에서 유력한 가신이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배반하여 막부는 멸망하게 됩니다.

  • 1200
  • 1300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은 왕조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겐무 신정, 建武の新政)를 시작하지만 무사들의 반발로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에 의해 타도되고 고다이고 천황은 요시노(나라현)로 피신합니다. 한편 다카우지는 고묘 천황(光明天皇)을 옹립하고 교토를 본거지로 한 무가 정치의 방침을 내세웁니다. 이후 요시노의 남조와 교토의 북조가 대립하게 됩니다. 이윽고 각지의 무사단의 세력다툼으로 확대되어 이 쟁란은 몇십 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산 위 등의 험한 지형을 이용해 적의 접근을 어렵게 만든 ‘야마시로(山城)’라는 성이 출현합니다. 고다이고 천황(後醍醐天皇) 세력의 막부 반대 세력이 산 위에 만든 성에서 농성하면서 막부군과 싸우며 소수 부대로 대군에게 승리한 일이 개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전투 방식이 정공법을 피하고 여러 개의 도리데(砦, 규모가 작은 성)를 쌓고 지원군을 기다리며 농성군을 공격하는 지구전이 많아졌고 성은 방어만이 아니라 군사 거점으로서도 축성되게 되었습니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남북조가 대립하는 가운데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의 손자인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満)가 교토의 무로마치에 하나노고쇼(花の御所)라고 불리는 저택을 짓고 이곳에서 정무를 수행하면서 무로마치 막부가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시미쓰의 강력한 정치력으로 남조를 북조에 통합시켜 남북조가 통일됩니다.
이로 인해 무가 정권이 천황과 구게(公家, 조정) 위에 서고 무사가 일본의 통치자가 되어 쇼군(将軍)과 지방을 통치하는 영주(大名, 다이묘)가 연합하는 형태로 정권이 안정되어 갑니다.

  • 1400

남북조의 동란이 수습되자 성주는 생활이 불편한 야마시로(山城)에서 평지에 거관(居館)을 짓게 되었습니다. 이 저택은 군사적인 우위성은 없지만 정치적인 권위의 상징으로 여겨진 ‘하나노고쇼(花の御所)’를 모방한 것입니다.

전국 시대(戦国時代)

그러나 6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가 암살되자 쇼군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유력한 다이묘의 주도권 다툼으로 지방의 다이묘와 농민까지 두 편으로 나뉘어 싸운 오닌의 난(応仁の乱)이 일어났습니다. 이 전란은 11년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주된 싸움터가 된 교토는 황폐해지고 막부 또한 힘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 각지에서 독자적인 지배권을 확립한 다이묘가 주변의 다이묘와 싸우며 점차 영지를 확대해 넓은 지역을 통일하는 권력이 됩니다.

그 가운데 천하통일을 거의 이룬 것이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였습니다. 노부나가는 오와리(아이치현 서부) 서남부의 한 지방 다이묘의 적자였는데 가독(家督)을 상속받자 쓰루가(시즈오카현)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를 물리치고 미카와(아이치현 동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동맹을 맺어 서서히 오와리의 지배를 견고히 했고 이누야마성의 오다 노부키요(織田信清)를 물리치면서 오와리를 통일했습니다. 그 후 미노(기후현)의 사이토씨(斎藤氏)를 멸망시키고 기후를 본거지로 세력을 넓혀 나갑니다. 그리고 실권을 잃고 각지를 전전하던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불러와 교토에서 쇼군으로 옹립하고 막부를 다시 부흥합니다. 하지만 요시아키는 노부나가의 뜻을 떠나 독자적인 정치를 하다가 결국 다른 다이묘들과 규합하여 노부나가를 쓰러뜨리려 했기 때문에 기나이(畿内)에서 추방됩니다.

  • 1500

전란이 정상화되자 지금까지의 저택과는 별도로 전시에 농성하기 위한 성을 쌓게 됩니다. 산의 낭떠러지 절벽과 같은 지형을 이용한 야마시로(山城)가 많았고 평지에도 강 외 늪이나 연못, 습지와 같은 자연의 요충지를 잘 활용해 구축했습니다.

또한 전투 규모도 대형화되어 다이묘가 늘 거처하는 본성(本城) 외에도 영내의 중요한 지역이나 국경 부근에 지성(支城)이라는 보조적인 성이 축성되어 성의 숫자와 규모 모두 대형화되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시대의 성의 숫자는 50,000개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1537이누야마성이 축성됨

오다 노부나가의 할아버지인 오다 노부야스에 의해 기노시타성(木之下城, 이누야마성에서 남남서, 현 시청 부근의 아타고 신사 일대)에서 성곽을 해체해 이전했다고 합니다.

1565오다 노부나가의 침공

노부야스가 오다 노부히데(織田信秀, 노부나가의 아버지)를 따라 미노(기후현)의 사이토 도산(斎藤道三)을 공격한 전투(이나바야마성 전투, 稲葉山城攻め)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인 오다 노부키요(織田信清)가 성주가 되었습니다. 노부키요는 한때 노부나가를 신종(臣從)했지만 영지 배분을 둘러싸고 다시 대립합니다. 노부나가는 1564년, 이누야마성을 6,000명의 병사로 공격하고 성 아래에 불을 지릅니다. 이에 노부키요는 이누야마성을 비워주고 가이(甲斐, 야마나시현)로 도망가면서 전투는 노부나가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이 후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가 성주가 되었습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安土桃山時代)

요시아키를 추방한 노부나가는 교토에서 가까운 아즈치에 웅장한 성(아즈치성)을 쌓고 각지의 다이묘를 복속시켰는데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습격으로 교토의 혼노지(本能寺)에서 목숨을 잃습니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천하를 통일한 이가 가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입니다. 주군의 적인 아케치를 토벌한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후계자로서 지위를 확립해 나갑니다. 그리고 히데요시가 오사카 성을 쌓자 이에 반발한 노부나가의 차남 노부오(信雄)가 아버지의 동맹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손을 잡고 미노의 국경에서 대치합니다(고마키・나가쿠테 전투, 小牧・長久手の戦い). 반년 이상 계속된 싸움은 이에야스・노부오군이 우세했지만 히데요시와 노부오가 화해하고 이에야스도 철수하면서 전쟁은 끝을 맺게 됩니다. 그 후 히데요시는 불과 8년 만에 천하통일을 이룩하고 안정된 지배 체제를 만듭니다. 그러나 히데요시 사후 히데요시의 법도에 반하여 독자의 권력을 강화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대해 법도를 지키고자 하는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군사를 일으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에야스가 이시다에 반대하는 다이묘들과 이시다 미쓰나리 토벌을 위해 진군하여 세키가하라(기후현)에서 대치합니다(세키가하라 전투 関ヶ原の戦い). 미쓰나리군(서군)의 병력 약 84,000명, 이에야스군(동군)의 병력 약 74,000명이라는 일대 결전이었지만 미쓰나리군에서 아군을 배반하고 적에게 붙은 무장이나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 무장이 속출합니다. 결국 몇 시간에 걸친 싸움은 이에야스군의 압승으로 끝납니다.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축성된 기후성(1567), 아즈치성(1576)을 비롯해 거대한 덴슈와 높은 석벽, 넓은 해자를 겸비한 성이 일반적인 양식이 됩니다. 게다가 많은 성에서 소가마에(惣構)라고 하는 해자 등으로 둘러싸인 성 아랫마을(城下町)이 건설되고 성은 정치적인 중심이 됩니다. 그 상징이 된 것이 덴슈로, 거대한 덴슈를 세워 권력과 경제력을 과시함으로써 싸우지 않고 다툼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노부나가가 탄생시킨 성 본연의 모습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그 뒤를 계승하여 현재 성의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1584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첫 번째 싸움의 무대로

고마키・나가쿠테전투(小牧・長久手の戦い)는 히데요시군이 이누야마성을 점거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이누야마성의 성주였던 오다 노부오(織田信雄)의 가신, 나카가와 사다나리(中川定成)가 이세에서 벌어진 전투에 나가 있어 전투력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거기에 노부오의 가신인 이케다 쓰네오키(池田恒興)가 히데요시 측으로 돌아섭니다. 과거 성주였던 그는 이누야마성의 약점인 북쪽, 기소강을 건너 성내로 침입해 성을 함락했습니다. 이누야마성 전투에서 승리한 뒤 히데요시가 입성하여 고마키산성에 진을 친 이에야스와 대립했지만 양자 사이에 강화가 맺어지면서 이 전투는 상처투성이의 무승부로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누야마성은 오다 노부오(織田信雄)에게 반환됩니다.

1600세키가하라 전투의 전초전에서 최전선 기지

히데요시의 옛 신하였던 당시 이누야마 성주 이시가와 사다키요(石川貞清)는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의 서군에 속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와리 국내에도 기요스성의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었기에 이누야마성은 서군의 최전선 기지가 되었고 지원군이 몰려와 수비를 구축합니다. 하지만 이에야스의 중신인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의 책략으로 서군 지원군의 장수가 배반하면서 이누야마성의 성주인 이시가와 사다키요(石川貞清)는 성을 물러나고 패배합니다. 그 후 미노・기후성 전투를 거친 동군은 단숨에 세키가하라까지 공격해 올라갑니다. 전투가 끝난 뒤 이에야스 측의 오가사와라 요시쓰쿠(小笠原吉次)가 입성합니다.

에도 시대(江戸時代)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패권을 확립하고 에도를 본거지로 한 무가 정권(에도 막부)를 수립합니다. 그리고 막부와 대립하거나 따르지 않는 가신의 영지와 신분을 박탈해 가문을 망하게 하는 엄벌을 내리고 무력을 배경으로 한 권위로 가신을 통제합니다. 도요토미 가문과의 전투(오사카 전투, 大坂の陣)에서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킨 뒤에도 막부는 일국일성령(一国一城令),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와 같은 법령 등을 공포하면서 가신 통제를 강화합니다.

하지만 영주의 무력 지배에 고통받던 영민(領民)이 무장봉기해 영주에게 반발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또한 막부에 의해 처분되어 모실 주군을 잃은 무사(낭인)때문에 치안이 악화되었고 막부에 대항하는 사건도 일어나게 됩니다.

그 때문에 막부는 기존 무가의 가치관을 바뀌고 무위를 사용하는 대신 예의를 중시하고 상하 질서 유지를 추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듭되는 자연재해와 기근을 극복하여 백성을 보호하는 나라(막부)로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팍스 도쿠가와나(도쿠가와의 평화)라고 불리는 태평한 시대가 됩니다.

그러나 그동안 한정된 나라와 교역해 온 막부는 개국을 요구하는 구미 제국의 압력에 크게 동요합니다. 막부는 전쟁을 피하기 위해 개국을 받아들이는데 이런 자세에 불만을 가진 무사들 사이에서 이국을 격퇴하고 소극적인 막부도 무찌르자는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조슈(야마구치현)와 사쓰마(도쿠시마현)에서 구미의 군대와 교전하는 사건(시모노세키 사건, 사쓰에이 전쟁)이 발발합니다. 그러나 모든 전투에서 패하자 구미의 군사력을 통감하고 막부 타도로 방향을 틀게 됩니다.

막부 타도파에 궁지에 몰린 요시노부(徳川慶喜)는 내란을 피하기 위해 정권을 조정에 반환합니다(다이세이 봉환, 大政奉還). 하지만 요시노부의 복권을 두려워한 막부 타도파는 정변을 일으켜 조정을 제압하고 신정부 설립을 선포합니다(왕정복고 대호령, 王政復古の大号令).
동시에 요시노부의 영지 반환과 관직 사퇴(사관납직, 辞官納地)를 결정합니다. 예상대로 이에 반발한 구 막부군과 신정부 간의 전투(도바・후시미 전투, 鳥羽・伏見の戦い)가 일어나고 하코다테의 고료카쿠에서 구 막부군이 항복할 때까지 싸움은 계속되었습니다(보신 전쟁, 戊辰戦争).

  • 1800

세키가하라 전투 뒤에 실시된 영지 교환과 포상으로 전국에 많은 성이 세워졌습니다. 현존하는 성의 대부분이 이때 축성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오사카 전투 후 막부는 ‘일국일성령(一国一城令)’이라는 법령을 공포하고 하나의 나라에 하나의 성만 인정하여 그 밖의 성을 폐성할 것을 명했습니다. 또한 ‘무가재법도(武家諸法度)’을 통해 새 성의 축성뿐만 아니라 영주가 거처하는 거성(居城)이라도 수리 외의 새로운 공사를 일절 금지했습니다. 이렇게 일본의 성은 격감해 갑니다.

1617나루세 마사나리가 이누야마성을 하사받음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중신 나루세 마사나리(成瀬正成)가 성을 하사받습니다. 이 때 개량이 더해져 현재 덴슈의 모습이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나루세가문이 에도 막부시대 말까지 성주를 맡게 됩니다.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구 막부군과 전투를 하면서 신정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의 기본을 명시한 ‘5개 조의 서약문(五箇条の誓文)’을 발표함과 동시에 에도를 도쿄로 개칭하고 연호를 메이지로 정합니다. 그리고 토지와 백성을 조정에 반환하는 판적봉환(版籍奉還), 번(藩)을 폐지하고 현(県)을 두는 폐번치현(廃藩置県)을 실시하고 중앙에서 부지사(府知事)와 현을 통치하는 현령(県令)을 파견하여 행정을 다스리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또한 구게(公家)와 번주는 화족(華族), 무사는 사족(士族)이 되어 농민과 정민(町民)인 평민과는 구별되지만 신분제에 의한 제약이 거의 없는 평등한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되었습니다. 한동안은 2개의 칼을 차고 다니는 무사도 있었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칼을 휴대하는 것이 금지되어(폐도령, 廃刀令), 외견상 무사의 특권도 폐지됩니다.

  • 1900

‘폐번치현’실시 후 국유 재산이 된 각지의 성은 군의 기지로서 필요한 성곽과 불필요한 성곽을 구별해 각각 육군과 오쿠라쇼(大蔵省, 한국의 재정경제부에 해당)가 관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병영 건축을 위해 철거하거나 지방자치단체에 불하하여 학교나 관공서로 사용되면서 성의 수는 더욱 줄어듭니다.

1871덴슈 이외 철거됨

폐번치현(廃藩置県)으로 아이치현의 소유가 되고 덴슈 이외 모든 건물이 철거되었습니다. 철거가 된 구조물의 일부는 불하되어 야라이문(矢来門)은 후소쵸(扶桑町)의 센쥬인히가시문(専修院東門)으로, 구로문(黒門)은 오구치쵸(大口町)의 도쿠린지(徳林寺), 마쓰노마루문(松ノ丸門)은 이치노미야시(一宮市)의 죠렌지(浄蓮寺), 우치다문(内田門)으로 전해지는 성문은 즈이센지(瑞泉寺)로 이축되어 현존하고 있습니다.

1891노비대지진으로 반파된 덴슈

매그니튜드 8.4의 ‘노비 대지진’에 의해 덴슈가 반파되는 큰 피해가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1895년에 수리를 조건으로 현에서 옛 번주였던 나루세 가문에 양도했고 나루세 가문과 이누야마 시민의 기부금으로 무사히 수리되었습니다.

다이쇼 시대(大正時代)

쇼와 시대(昭和時代)

1940년대에 아직 20개 남아있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의 공습으로 소실되거나 무너져서 현존하는 덴슈는 히로사키성, 마쓰모토성, 마루오카성, 이누야마성, 히코네성, 히메지성, 마쓰에성, 빗츄마쓰야마성, 마루가메성, 마쓰야마성, 우와지마성, 고치성의 12개만 남습니다.

1952국보로 지정됨

1935년 전쟁 전의 법률‘국보 보존법’에 의해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전후 1952년에 문화재 보호법에 의거해 ‘국보’로 새롭게 지정되었습니다.

1965해체 수리 완료

1959년의 이세만 태풍으로 피해를 입고 1961년부터 1965년에 걸쳐 해체 수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해체 수리 때 실시한 조사를 통해, 처음 2층의 야구라(망루)를 쌓은 뒤 그 위에 망루를 올리고 망루의 기초 부분에 가라하후를 더하는 큰 개조를 거쳐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헤이세이 시대(平成時代)

  • 2000

2004‘아누야마성 하쿠테이문고’에 이관

일본 유일의 개인 소유 성으로 보존되어 왔지만 2004년 ‘사단법인 이누야마성 하쿠테이문고(현재는 공익 재단법인)’의 소유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現代)

이누야마성은 일본의 중요한 문화재입니다. 이누야마성을 관리하는 이누야마시는 방문객에 대한 대응과 청소 등의 일상적인 유지 관리, 24시간 경비 체제와 함께 이누야마성을 현재의 모습 그대로 후세에 전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이누야마성의 수리와 정비를 하고 있습니다.